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벌지 전투 (문단 편집) === 작전 초기 === 12월 16일에 시작된 독일군의 공세에서 해당 지역을 담당하던 미군 8군단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핫소 폰 만토이펠]]은 기습 시점을 새벽 5시 30분으로 변경하면서, 칠흑 같은 안개 속 적의 시야가 완전히 가려진 틈을 타 미리 정해진 목표에 효율적인 포격과 동시에 고사포 진지에서 탐조등을 비추어 보병의 돌격로를 이끌어낸 다음, 일몰 후에 전차를 투입하여 전과를 확대시키는 작전안을 편성했고 이에 맞춰서 제5기갑군을 철저하게 훈련시켰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군복을 갈아입고 전투 지역을 미리 답사하는 등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형상으론 이 지역에 4개 사단과 그외 다수의 지원 부대를 보유한 8만 3천 명의 미군[* 나중에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 아르덴 지역에 전개된 미군은 60만 명 이상이었다.]이 주둔했어도 전부가 일선에 있었던 건 아니었다. 또한 일선 부대가 담당하는 구역이 너무 넓어[* 전선 정면의 최북단부터 최남단까지 112km의 구간을 딸랑 1개 군단이 수비했다.] 해당 지역의 미군 내부에서도 이를 우려하였으며, 항공 정찰을 통해 포착한 이상 징후도 상급 사령부에서 무시당했다. 해당 지역을 맡은 병사들의 수준과 사기도 평균 이하였다. 일부 부대는 처음 배치된 병아리 부대였으며 다른 일부는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고 휴식과 재편성 목적으로 배치된 부대였다. 게다가 연합군 수뇌부는 아르덴 지역을 위험도가 낮은 지역으로 분류했다. 미군 사령부는 이곳을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후방으로 돌려진 미군들을 위한 휴양지로도 운영하였다. 또한 아르덴 지역의 연합군 부대들이 많은 장병들에게 휴가와 외출을 허용해 병력이 줄어든 상태인 데 반해 독일군은 아르덴 지역에 25만 명 이상을 투입해서 3배나 더 많은 수적 우세를 확보하였다. 이런 배경 상황과 허술한 대비 태세가 맞물려 초기엔 작전이 독일군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게다가 미군에겐 다른 불운도 있었다. 하필 아르덴 대공세 직전 회의를 위해 18공수군단장 [[매튜 B. 리지웨이]]와 101공수사단장인 [[맥스웰 테일러]]가 미국 본토에 가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지휘 공백이 발생할 수 있었다. 이는 다행히 당시 82공수사단장인 제임스 가빈 소장과 101 공수사단 부사단장인 앤서니 맥콜리프가 각각 군단장과 사단장 임무를 대행해서 공백을 막을 수 있었다. 허를 찔린 연합군은 [[충격과 공포]]에 빠져서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계속 밀리고 있었다. 연합군의 대응이 늦어진 것은 독일군의 공중 강습도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독일군은 [[대대]] 규모의 [[공수부대|팔슈름예거]]를 투입했는데, 이들은 너무 분산된 채로 강하하고 만다. 또한 원래의 목표에 도착하지도 못했다. 노르망디에서 일어난 연합군의 사례가 '공수 작전 금지' 조치로 공수 노하우가 부족한 독일군에게 그대로 재현된 상황. 하지만 본대를 위장하기 위해 같이 투하한 독일군의 공수부대 인형이 정확히 목적지에 도착한 까닭에 연합군은 독일군이 최소 여단 규모의 공수부대를 투입했다고 착각하고 만다. 이에 후방 지역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추가 부대 파견을 잠시 주저하면서 독일군의 압박을 받고 있던 연합군 일선 부대들이 줄줄이 털려나갔다. 여기에다가 독일군이 펼친 교란 작전도 주효했다. [[오토 스코르체니]] [[대령]]이 [[영어]]를 잘하는 병사들을 선발하여 [[미군]] 군복을 입고 돌아다니면서 허위정보를 뿌리고 다니는 덕분에 후방까지 교란당해 버린 것. 이 과정에서 사기치고 다니는 독일군을 색출한답시고 토박이 [[미국인]]만 알 수 있는 상식을 물어보는 등 검문 검색이 강화되었다. 예를 들면 [[미키 마우스]]의 여자친구 이름은? [[일리노이]] 주의 주도는 어디? [[뉴욕 양키스]]의 주전 선수 이름은?[* 정답은 각각 [[미니 마우스]], [[스프링필드(일리노이)|스프링필드]], [[조 디마지오]].] 같은 것. 하지만 아무리 미국인이라도 이런걸 전부 알진 못했기 때문에 졸지에 스파이로 몰렸다. 심지어는 검문하는 병사들이 답을 잘못 알고 있어서 정답을 말했는데도 잡혀가거나,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에 '''아예 총살돼버리거나 오인폭격당하는''' 병사들까지 속출...[* 영화 '세인트 앤 솔저'에서도 이런 상황을 묘사한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선 한술 더 떠서 주인공 일행이 계속 정답을 말하자 검문하던 헌병 왈, 어떻게 그걸 다 알고 있냐?(...)] 심지어 [[오마 브래들리]] 장군마저 정답을 말하고도 수 시간 억류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자신이 거주했던 미주리 근처이기 때문에 정답을 말했으나 병사는 '''시카고로 정답을 착각했기 때문.''' 다만 이 헌병이 '멍청해서 브래들리를 억류한' 것이기만 했는지는 좀 묘하다. 이후에 헌병이 '베티 그레이블(당대의 미국 여배우)의 남편 이름을 말하라'라는 질문을 하였고, 브래들리는 여기에 대답을 하지 못했는데도 그냥 브래들리를 풀어줬기 때문이다. 즉 상대가 브래들리임을 알면서도 --평생의 안주거리를 위해-- 일부러 골탕을 먹이기 위해 구금했을 가능성도 있다. --???: 군대에서 쓰리스타 구금했던 썰 푼다-- 게다가 스코르체니 특공대의 병사들이 연합군에게 붙잡힌 후 고문을 끈질기게 버틴 끝에[* 스코르체니가 "고문을 오래 견딜수록 게르만인의 긍지가 빛날 것이며 적들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라고 훈시했다고 한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원수의 목을 따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다!"는 거짓 자백을 하여 후방에 대기 중이던 연합군이 총사령부 건물에 전차를 출동시키는 등 비상이 걸려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들 위장 특공대원들은 나중에 군사재판에 넘겨져 전원 총살형에 처해졌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M10_panther.jpg|width=100%]]}}}|| || '''스코르체니 특공대의 판버린''' || 다만 원래 이 부대는 미군 전차로 위장한 판터와 티거로 구성된 위장 전차 부대까지 포함한 부대였으나, 이후 전선이 고착되고 도로망 문제까지 겹쳐지는 것으로 이 기갑 부대는 다른 전선으로 끌려가 소모되어야 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으로 인해 독일군은 초반의 며칠 동안은 주도권을 잡고 아르덴 각 지역을 쑥대밭 내며 연합군을 몰아붙일 수 있었다. 끝이 없는 미군 포로들의 행렬에 병목 현상이 일어나자,[* 다만 서부전선도 히틀러의 자살 이전까지는 격전이 계속됐고 미군이 대규모 패배를 당하지는 않았으나 독일 본토에서 대대급 이하 소부대가 궤멸되는 일은 꾸준히 반복됐기 때문에 미군 포로는 전쟁 막판까지 꾸준히 발생하기는 했다. 이 때 붙잡힌 미군 포로들은 포로수용소로 압송되고 유대인으로 밝혀지면 학살당했으며, 살아남은 자들은 다음해 5월 독일의 항복으로 석방되었다.] 발터 모델 원수가 직접 원수 지휘봉을 들고 교통 정리를 했으며 독일 병사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이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희망까지 품게 되었다. 이러한 독일군의 초기 승리에 고무되어 디 도이체 보헨샤우(Die Deutsche Wochenschau)[* 독일군 전시 주간 뉴스.]는 독일군의 전과를 적극 홍보했고, 일시적으로나마 독일 국민의 사기가 진작되고 국방군에 대한 신뢰도와 인기가 급상승하기도 했다. 독일군 선봉장인 만토이펠의 제5기갑군의 진격은 후일 미군 부대의 분석에서 '주어진 여건을 초월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극찬을 받게 된다.[* Battle of the Bulge 1944 (2): Bastogne (Osprey Campaign)]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